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마르틴 니묄러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나치가 공산당원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nicht protestiert;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그들이 노동조합원에게 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Jud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Jude.

 

그들이 유태인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te.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항의해 줄 누구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



 요즘 읽고 있는 새로 나온 한일 전쟁 소설, 작전명 충무에서 위와 같은 시가 나오더군요. 예전에 한 번 시를 접했을때 마음 한구석에 큰 울림을 주었던 시라 다시금 그 메세지를 되새기고 싶어서, 이렇게 포스팅 해봅니다.

 지은이 마르틴 니묄러는 아이러니 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U보트의 함장이었으나 전후 루터파 신학자가 되었다고 하네요. 나치스의 종교정책에 저항하기도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동서 독일의 통일을 주장했다니 2차대전때도 독일인이 모두 나치가 아니었나 보네요.



구글(Google) 웨이브(Wave) 초대장 드립니다.




 이미 구글 웨이브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필요하신 분 있으시면 비밀글로 메일 주소 남겨주시면, 초대장 보내드릴게요.


프로필 사진입니다.




 작년 여름, 샌프란시스코의 치즈케익 팩토리에서 저녁을 함께한 갈매기입니다. 멀리 삭스도 보이네요.


Google announces Android press conference for January 5th


Well well. Look at this. Taking a page from the CES-challenging Apple / Macworld playbook, Google has announced a press event on January 5th (just like we told you) in Mountain View, stating:
With the launch of the first Android-powered device just over a year ago, we've seen how a powerful, open platform can spur mobile product innovation. And this is just the beginning of what's possible.

Please join us in Mountain View on January 5, for an Android press gathering.
If this lines up with the news we've seen recently, it's likely a Nexus One announcement will be the order of the day, and most (if not all) of your nagging questions will get answered. You know we'll be there live... so hang on to your hats, and mark down the date!


 구글이 1월 5일 안드로이드 관련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넥서스 폰 일명 구글폰을 정식으로 발표하게 될 것 같네요. 현재까지는 정식으로 발표되지 않은 상황이니~

 미국 날짜로 1월 5일면 아마 국내는 1월 6일 새벽 쯤에 기사가 올라오지 않을까 합니다. 아직까지 국내 사용가능 및 도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니, 여유 있게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군요.



2009년 12월 30일 수요일

60억분의 1, Davos forum에 참가할 기회를 잡으세요



전세계에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가요?
 

그럼 지금 참여하세요.


선정 인원이 단 한명이라는게 아쉽네요.

심사위원 중 한명은 파울로 코엘류라는 익숙한 인물이네요.


Restaurant city 하시는 분 있으신가요?

 

facebook에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게임하나 소개하겠습니다.

 

 Restaurant city 라는 게임입니다. 흔히 심시티 같은 식당 경영 게임이라고 보시면 될 거 같은데, 재미있는 점은 페이스북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요리재료들도 트레이드 가능하고 요리들도 레벨업을 하는 재미가 있네요. 식당도 레벨업을 할 수록 더 커지네요. 약간의 중독성도 있습니다만, 흔한 RPG 게임과 같은 단순 노가다 게임은 아니라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해도 충분히 재미 있습니다.

 혹시 이미 하시고 있으신 분은 친추 해 주세요~ sid yim 으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성공하고 싶으신가요? Richard St. John's 8 secrets of success

 

 

 성공의 8가지 비밀

 

처음으로 접한 TED의 팟캐스트.

 

성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 프레젠테이션.

 

정말 프레젠테이션은 이렇게 해야 재밌다.

 

언급하는 인물들이 누군지를 알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듯.

 

 

 

 

2009년 12월 28일 월요일

새 블로그 시작

 

 새 블로그...

 

열심히 운영해야 할 텐데...

 

 

표현주의와 화가들

 

프랑스에서 야수주의가 태어난 1905, 같은 해에 독일의 드레스덴에서는 네사람의 젊은 화가들이 다리그룹을 결정했다. 다리라는 명칭부터가 새로운 예술에로의 다리를 놓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그룹의 주역은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이며, 그 이듬해에는 에밀 놀데가 이에 참가한다. 그리고 이들이 곧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첫 물결을 형성시킨다. 그러나 이 표현주의 경향은 본래가 게르만 민족 고유의 특성으로서 독일 미술의 하나의 전통의 기틀이기도 하다. 예컨데 프랑스를 포함한 라틴 민족에 있어서는 명쾌한 형태와조형 질서가 미술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면, 게르만 미술은 신비와 고뇌, 그리고 그 어떤 형이상학적 불안으로 물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다리 운동은 직접적으로 독일에 뒤늦게 풍미하기 시작한 인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프랑스의 야수주의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 원색의 범람, 난폭한 필촉, 기법의 단순화 등이 그 공통점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근본적인 차이점도 많다. 그 근본 원인은 아마도 민족성의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겠으며, 또한 두 회화운동의 사회적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다리 운동에서 비롯된 독일 표현주의는 일군의 선구자를 가지고 있다. 반 고흐를 위시해서, 노르웨이의 에드바르트 뭉크, 벨기에의 제임스 앙소르 등이 그들이다. 제임스 앙소르의 표현주의 경향에는 풍자적인 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그 풍자는 때로는 사회적인 풍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풍자성은 흔히 으시시한 환상적 성격을 띠고 나타나며 그리하여 환상과 현실이 서로 탈을 바꾸어 쓴 듯한 기이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와 같은 북유럽의 세기말 화가들의 계보 위에 선 다리 그룹의 화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는 동료 화가들보다 거의 한 세대 연장자인 에밀 놀데이다. 원래 종교적인 성향이 짙은 그는 남달리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데포르마숑(déformation)과 생략으로 강력한 표현력을 얻어, 때로는 자연의 신비를 때로는 인간 영혼의 심연을 그리고 있다. 이에 비해 루드비히 키르히너는 근대 문명과 대결하여 그 모순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근대 문명에 의해 말살되어 가고 또 메카니즘 속에 묻혀 가는 시대상을 그는 특유의 예각적인 선으로 파헤친다.

 

독일 표현주의의 제 2 의 물결은 1911 , 뮌헨에서의 청기사 그룹의 결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 그룹 결성의 주역은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이며, 곧 이어 여기에 파울 클레가 합세한다. 그러나 이 제 2 의 물결과 함께 표현주의 자체의 양상도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칸딘스키의 첫 추상 콤포지션이 제작된 것이 그 일년 전인 1910 년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청기사 운동은 다리 그룹처럼 격정적인 인간 내면의 표현보다는 보다 더 조형적인 혁신이라는 문제점에 주안점을 둔 운동이었다.

 

프란츠 마르크는 아마도 청기사 운동의 이념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화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형태의 단순화와 그것을 더욱 강조하는 강렬한 색채의 통합은 매우 야심적인 시도였으며, 만일 그가 한창 나이에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았던들 그의 그 조형적 시도는 큰 결실을 맺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울 클레를 표현주의 화가로 간주할 수 있느냐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천의무봉의 자유자재한 그리고 그칠 줄 모르는 환상과 시정, 또 그것을 완전무결하게 통어할 수 있는 투철한 조형 의식, 이런 것들은 넓게 해석해서 청기사의 이념과 일치할는지도 모른다. 청기사 운동은 바실리 칸딘스키에 의해 그 이념이 제창되었고 또 그 자신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제창한 이념은 한마디로 철저하게 비재현적인 색채의 자율적 표현력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스스로가 느끼는 감동을 그 어떤 구체적인 형태에 위탁함이 없이 색채 자체로서 표현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태어난 것이 이른바 내적 필연성의 표현이며, 그리하여 그 표현은 색채에 의한 추상, 즉 추상 표현주의의 원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내밀한 환상의 화가, 우리에게 환상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환상을 이끌어 주는 화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의 기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선적인 것, 얼룩진 것, 그리고 사실적인 것 등이다. 이 중 선적인 그림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특히 키르히너등의 다리파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놀데의 종교적인 주제, 페히슈타인과 키르히너 등의 유토피아적인 주제, 신즉물주의의 딕스나 그로츠의 사회비판적인 주제, 벡크만과 마르크의 상징적인 주제, 코코슈카의 비관적인 인간심리 주제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뭉크 : 여자 가면 아래의 자화상 1891-1892

뭉크 : 외침(절규) 1893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천재로 일컬어짐. 표현주의의 선구자. 가정환경으로 어머니와 누나가 폐결핵으로 사망. 감수성이 빠르고, 병약하고 고독한 성격이 드러남.

 

1. 여자 가면 아래의 자화상

붉은 벽면 위에 여자의 커다란 마스크가 걸려 있고, 중심을 약간 벗어난 위치에 자화상이 있음. “나와 가정는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을 이길 수 없었다고 고백하듯이 뭉크는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부친의 비정상적인 성격과 자기를 포함한 가족이 병을 앓고 있는 환경 속에서 내성적인 뭉크는 어떤 숙명이나, 운명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 마스크는 그의 운명의 상징이 아닐까?

 

2. 절규

화면 하부 중앙에서 두 손을 볼에다 대고, 눈을 크게 뜨고, 소리는 지르는 인물. 원근법적인 구도에 화면을 비스듬히 구획하는 다리와 난간, 뒤쪽에 보이는 길쭉한 두 인물이 보이고 노랑, 빨강, 파랑의 원색을 강렬하게 사용한 배경과 리듬감 있는 곡선과 폭넓은 곡선의 대비는 아르 누보(유겐트 슈틸)의 전형임. 후미에 떠 있는 두척의 배 이외에는 완전하게 세부를 생략하여,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 주변은 평온하고, 주위 사람들은 무관심할 때 쓰기는 불안감을 극적으로 표현. 뭉크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껴서 노트에두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저물었다. 나는 우울증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우뚝 서 버렸다. 죽을 것같이 피곤해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검푸른 도시의 피오르드(바닷물이 육지에 들어오는 협만)에 피와 칼같이 걸린 타오르는 구름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무서움에 떨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을 찌르는 크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고 술회.

 

제임스 앙소르(1860-1949)

벨기에 출신의 화가. 고향 오스텐드에서 본 마스크와 인형등을 작품속에 투영하여, 플랑드르의 화가인 보쉬나 브뤼겔의 전통을 이음. 그에게 마스크는 위협적이면서 동시에 마스크를 쓴 사람의 정체를 감출 수 있다는 점에서 숨겨진 욕구나 의식의 반영물로 등장.

 

3. 제임스 앙소르 : 브뤼셀에 예수의 입장 1888.

1888년의 256x378의 대작으로 주제는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주제. 종교적인 축제는 군중의 히스테리에 찬 사회주의 축제로 변모. 예수는 행렬 뒷쪽에 나타남. 그의 머리위에는 사회주의 만세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그리스도는 존재하지만 그가 중심이 아니라 압도적인 군중들에 의해 무시당함. 강렬한 원색은 눈을 피로하게 하고, 마스크를 쓴 군중들의 혼란함을 느낄 수 있음.

 

키르히너(1880-1938)

드레스덴 공과대학에 입학한 건축학도. 기하학, 수학, 건축디자인 등을 공부. 1904년 뮌헨에서 로트렉과 시냑의 그림을 보고, 돌아와서 다리파를 결성

 

4. 키르히너 : 일본 우산 밑의 여인 1909, 92.7x80.3,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 소장

1909년 작품으로, 여인 누드가 화면을 가득히 채우면서 관람자는 마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을 갖게 됨. 전통적인 누드와는 달리 야만적이고 불건전한 분위기가 느껴짐. 이는 인간의 형체가 비정상적으로 과장된 데서 유래하고, 또 강렬한 원색들이 서로 조화하기보다는 충돌하고 긴장감을 조성함. 물감은 마치 엎질러진 것처럼 얼룩지게 번져있어 여인의 야한 분위기를 강조함. 여인은 더운 노랑색과 붉은 색채로 채색되고, 주변은 차가운 청색으로 채색됨으로서 더운 열기는 가라앉지만 배경의 노랑색과 붉은 색은 다시 화면 전체를 격렬한 에너지로 바꾸는 분위기임.

 

5. 키르히너 : 거리, 베를린 1913, 120.7x91.1, 뉴욕, 근대미술관

1911년부터 베를린에서 활동. 입체파의 영향을 받음. 이 그림에서는 날카로운 각진 선들이 V, A, N, M, 같은 형태의 표면구조를 이룸. 붓의 방향도 여러 번에 걸친 대각선의 빗금으로 뾰족하게 처리되어 얼굴과 다리 형태를 강조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줌. 우아하고 세련된 남녀들은 극적으로 축소된 원근법에 의해 비례가 왜곡되었고, 표면적인 화려함은 화합되지 않는 색채와 리듬으로 불안정함을 동반함.

 

 

에밀 놀데(1867-1956)는 다리파의 다른 회원들보다도 20세 연장자. 특히 그의 그림은 190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종교화가 특징임. 앙소르, 루오, 고갱등과 함께 현대 회화사에서 종교화가로 알려짐. .

 

6. 놀데 : 촛불을 들고 춤추는 여인들 1912, 100x85, 제뷜, 놀데재단

종교화를 그리던 시기에 놀데는 춤추거나 노는 모습을 제작.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빠른 리듬과 광란의 움직인은 육체적, 정신적 감정 분출의 적절한 표현주의적 주제가 되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충동과 본능을 찬미. 당시에 놀데는 민속박물관에서 원시조각을 보고 영감을 얻음.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오스트리아 태생. 1904년 비인 공예학교 수학. 1910년 베를린으로 옮겨 심리적 표현의 초상화를 제작. 1919년 드레스덴 미술학교 교수. 37년에는 비인 회고전에서 417점의 그림이 나치에 의해 몰수당함. 풍경화보다는 인물화에 독창성이 뛰어남. 데뷔부터화단의 테러또는미친 코코슈카로 불리고 사인은 OK로 함. 주제는 폭력적인 성()이나 남녀곤게의 심리, 인간 영혼의 비극적 상태나 죽음임.

 

7. 코코슈카 : 폭풍 1914, 181x 220, 바젤, 바젤 미술관

자신의 자서전적인 그림. 그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Alma Mahler)의 초상화.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미망인이었으며, 여러 남성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던 그녀는 코코슈카와 3년에 걸친 연애를 하였으나, 결국 건축가 월터 그로피우스를 택하여 떠나감. 이 그림에서 두 남녀는 마치 우주적 소용돌이 같은 소요와 극적 긴장 속에서 서로에게서 안식을 구하는 모습.

 

8. 코코슈카 : 붉은 계란 혹은 유럽 분할 1940

1934년 부상하는 나치즘을 피하여 체코의 프라하로 이주하여 그림을 그림. 거기서 동반자가 될 올다 팔코브슈카를 만나 영국으로 이주. 1938년 프랑스와 영국이 뮌헨 조약으로 체코를 히틀러에게 넘겨주는 사건을 풍자한 그림. 히틀러와 무솔리니로 풍자된 이태리와 독일, 삼색깃발을 과시하는 고양이로 표현된 고양이, 그리고 꼬리를 영국의 파운드 형태로 말아올린 사자 모습의 영국. 이 네 주인공이 체코를 상징하는 닭요리를 먹기 위해 식탁 주위에 앉아 있는데, 정작 제물인 닭은 빨간 계란만을 낳아놓고 도망가는데 성공. 이 그림을 통해 4개국이 체코의 폐망에 책임이 있음을 상징. 배경은 불에 휩싸인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모습이고 중앙에는 뮌헨 조약을 새겨넣음으써 영국과 프랑스의 표리부동함을 상징.

 

프란츠 마르크(1880-1916)

독일 뮌헨의 화가로 전원생활을 좋아하여 동물을 기르고 살면서 전원 풍경을 주로 그림. 칸딘스키와 함께 청 기사파 회원. 어린이들 미술과 원시미술을 찬양. 낭만주의적이고 정신주의적. 그에게 동물은 자연의 상징. 인간이 상실한 순수성의 상징으로 동물과의 교감에 대해 그림의 주제로 삼음.

 

9. 마르크 : 푸른 말, 1911, 103.5x180, 미니애폴리스, 워커하트 센터

그의 동물에 대한 관심은 1907년 동물 강의학을 강의하면서 생기고 1909년 이후에는 거의 동물화만을 그림. 동물 중에 특히 말에 관심이 많음(제리코와 비교). 이 그림에서처럼 완전히 객관적인 묘사에서 떠나 추상적인 형태와 곡선으로 자연과 동물의 화음을 추구. 색채는 노랑과 빨강, 그리고 파랑색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그는파랑색은 정신적이고 엄격하고 남성적 원리에 입각하며, 노랑은 부드럽고 유쾌하며 감각적이고 여성적 원리에 입각한다. 빨강은 물질의 상징이며 거칠고 무겁다고 주장.

 

10. 마르크 : 숲속의 사슴 1913-1914

1912년 파리에 가서 들로네를 만남. 그의 색채 병렬에 의한 광선과 구조에 영향을 받고, 화면의 색채를 파편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옴. 이 그림에서처럼 색채는 파편화되어 스테인드 글라스의 효과를 나타냄.

 

11. 마르크 : 싸우는 형태들, 1914, 91.1x 131.4, 뮌헨, 주립근대 미술관

일차대전을 앞두고 지식인들은 당시 세계에 대한 불만과 재앙이 다가 오고 있다는 믿음이 팽배해 있었는데 마르크는 이 그림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오기 위해서는 현세를 끝내야 한다는 사고를 반영. 오른쪽의 무겁고 차고 어두운 청색과 왼쪽의 가볍고 뜨겁고 밝은 붉은 색이 충돌하고 있음. 마르크는 1914년의 글에세계는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킨다. 이제는 단 한가지 의문만이 남아있다. 구 세계가 와해될 시기가 지금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새 생활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가장 긴박한 질문이다라고 적음. 이러한 의문을 갖고 전쟁이 발발하자 자진 입대하였으나 결국 1916년에 전사함.

 

칸딘스키 (1866-1944)

모스크바 태생. 30세를 넘기면서 뮌헨에서 화가의 길로 들어섬. 1909년부터 객관적 자연묘사에서 벗어나 순수한 추상의 길을 모색. 1911년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 그룹을 만듬. “청기사란 명칭은 칸딘스키가 좋아하던 기사의 모티브와 마르크가 좋아하던 청색이 합쳐진 이름이며, 동시에 청색으로 상징되던 정신성과 묵시록에서 나타나는 네 기사를 연상시킴. 그래서 작가의 내적 감정이 어떻게 새로운 회화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가를 실험하려는 그룹. 종합 예술의 성격을 띄었지만 특히 주된 관심은 음악이었음. 색채화음과 순수 음악의 화음과의 유사성을 찾으려 했던 칸딘ㅅ스키의 개인적인 관심이 나타남. 그는 회화적인 형태란 내면의 표현이라고 보았고 외부의 세계보다는 내면의 세계에 귀를 기울여 내적인 생명을 표현하려고 함. 1921년 바우하우스 교수가 되고 33년 파리로 이주 44년에 죽음. 색채의 이론의 두 축은 뉴튼의 이론에서 연유한 순수한 망막에 비친 색으로 파랑, 빨강, 노랑등의 보색대비 및 동시대비 효과에 근거를 둔 것으로 슈브렐의 영향을 받은 점묘주의와 현대 생활의 역동성을 표현한 들로네가 여기에 속하고, 또 다른 개념은 괴테에서 나온 것으로 영혼을 그 인식의 대상으로 하고 있음. 칸딘스키는 후자에 속함.

 

12. 칸딘스키 : 잡다한 인생 1907, 130x162.5, 뮌헨, 렌바흐하우스

초기 모색의 시기 작품으로 유화와 템페라, , 또는 계란 등의 다양한 시도를 한다. 이 그림도 두꺼운 검은 색 종이 위에 템페라로 모자이크 형태의 색을 점점이 채색함. 칸딘스키는 이러한 작품을 색채 드로잉(Color Drawing)이라고 불렀는데, 주제는 대개 밤, 겨울, 이별, 월광, 검은 고양이 등 낭만적이고 상상적인 주제를 그림.

 

13. 칸딘스키 : 즉흥 19, 1911, 120x141.5, 뮌헨, 렌바흐하우스

1910년부터 그의 작품은 대개 인상(Impression), 즉흥(Improvisation), 구성(Composition)의 세가지로 분류. 음악적인 제목은 음악이 그 연속적인 특징 때문에 감명을 효과적으로 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채택하고, 미술이 더 이상 묘사적 언어의 도움이 필요없이 그 자체로서 충족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옴. 1909년부터 시작된 1913년까지 34점의 즉흥의 연작은 내면 세계의 무의식적인 흐름이 자발적으로 표현된 작품. 표현주의에서 추상에로 변화하는 시기로 이 그림에서도 구체적인 이미지는 나타나지 않음. 단지 화면 오른쪽과 왼쪽에 기울어져 있는 인체의 무리가 연상되지만 내적 율동이 선으로 표현됨.

 

14. 칸딘스키 : 구성 V, 1911, 190x275, 스위스, 개인 소장

이 작품도 종교적인 주제의 하나. 1914년 쾰른의 강연에서 이 작품은 죽은 자의부활이라고 명명함. 눈에 띄는 것은 오른족 우에서 검은 리본같이 중앙을 가로 지르는 검은 곡선인데, 그는검은 색은 새로운 시작이나 가능성이 전혀 배제된 것과 같이 모든 것이 죽은 상태와 같다고 함. 이 형태는 암울한 전조를 예고하고, 그외에 중앙의 산이나 산 위의 탑, 오른쪽 아래의 인물, 왼쪽의 보트역시 암시적으로 표현. 이와같은 그림에 대한 그의 의견은 1910년에 집필하고 2년 뒤에 발간된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 자세하게 표현됨. 추상미술의 기초개념이 되는 글.

 

15. 칸딘스키 : 점 위에, 1928

1926..을 출판하고 60세를 맞은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의 부교장으로 그로피우스를 보좌함. 이시기의 특색은 원을 화면에 클로즈업 시키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의 직선이 이루는 조형적인 음악세계임. 수평선상의 세 개의 지점에서 나온 몇 개의 직선은 여러개의 삼각형을 형성하면서 마치 부채살처럼 공간에 확산. 삼각형과 원을 가로지르는 직선들이 서로 얽히면서 반향하는 조형적인 전개는 한편의 교향악이라 할 수 있음.

 

파울 클레 (1879-1940)

클레는 1879년 스위스의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8년 화가가 되기 위해 뮌헨으로 가기로 결심하지만, 음악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중요한 일부로 남아 있었다 클레는 매우 독립적인 작업을 하였고, 1911년까지 가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때 칸딘스키와 마르크를 만난다. 클레는 그들의 관심에 의해 힘을 얻었고, 그와 동일한 목표를 가진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기뻐하며 '청기사' 그룹에 가담하였다. 1914년에는 북아프리카를 여행하였는데, 그곳의 빛과 색채에 큼 감명을 받았다. 클레의 작품은 칸딘스키와 청기사의 영향뿐 아니라 브라크와 피카소 등 큐비즘의 영향도 있었다. 그의 작품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클레 특유의 추상성과 장식성, 변덕스러움과 우울함은 그의 음악과 여행, 예술가로서 스스로의 교육, 그리고 특유의 유머 감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클레는 1920년까지 이룩한 직업상의 명성으로 바이마르에 있는 바우하우스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예술가로서 해야할 중요한 일과 가르치는 임무와의 갈등으로 1931년 바우하우스를 떠난다. 당시 나치 정권의 정치 풍조에 혐오를 느낀 클레는 1933 12월 스위스로 돌아왔다. 나치는 1937 년 뮌헨에서 열린 <퇴폐 미술전>에 클레의 작품 17점을 포함시켰다. 또한 같은 해에 나치는 독 일 도처에 있는 공공 소장품 중에서 현대 미술품들을 압수했는데, 거기에는 클레의 작품 102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클레는 194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16. 파울 클레 : 죽음과 불 1940

말년의 작품으로 중앙에 희미하게 하게 빛나는 해골의 모습을 독일어 죽음(Tod)이 만든다. 축소된 인간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그는 얼굴도 사람의 형체도 없다. 죽음만이 무덤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지지 않은 불, 태양이 땅의 테두리, 즉 죽음의 손 위에 얹혀있다. 윗부분은 불의 빛으로 빛나고, 사람은 당당하게 빛속으로 걸어간다. 녹갈색의 죽음은 빛을 받아들인다. 미지의 세 개의 선이 위에서 내려오고 또 다른 선으로 인간은 죽음을 건드린다. 운명에 의해 죽게 된다면 인간은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반원의 죽음과 완전한 원형인 태양의 대조. 외부적인 사실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한 클레의 걸작.

입체주의(Cubisme)와 그 화가들

 

입체주의는 처음부터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난 회화 운동은 아니다. 입체주의라는 명칭 자체도 뒤늦게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거니와 몇 사람에 의한 조형적 혁신의 시도가 이윽고 한 세대의 주도적 미학으로서 근대 회화의 역사 속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형적 혁명의 선봉에 선 사람이 파블로 피카소와 죠르즈 브라크요, 이들에 호응하여 입체주의 운동에 참가한 사람이 후안 그리, 페르낭 레제, 로베르 들로네 등이다.

 

입체주의 회화가 구체적인 형태로 등장하기는 1907 년의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더불어이기는 하나, 입체주의라는 명칭은 1908 년에 제작된 브라크의 일련의 풍경화에서 유래한다. 같은 해의 살롱 도톤느에 출품된 그의 이 풍경화를 본 마티스가 이들 작품을 두고 [조그만 큐브의 축적]같다고 평했고, 그 말을 되받아 야수파란 말을 만들어낸 평론가 복셀이 [블라크는 모든 것을 기하학적 도식, 입방체로 환원시키고 있다.]고 한 평문의 발단으로 1909년부터 입체주의라는 명칭이 태어났다.

 

1907 년은 입체주의 탄생에 있어서의 역사적인 해이다. 입체주의 회화의 두 주역인 파블로 피카소와 죠르즈 브라크가 처음 상면한 것이 이 해 가을이었으며, 또 한편으로 그들의 새로운 조형적 추구에 있어 절대적인 지표가 되는 세잔의 회고전이 열린 것도 바로 같은 해의 살롱 도톤느였다. 그리하여 이 역사적인 만남, 즉 피카소와 브라크와의 만남과 또한 피카소와 브라크 및 세잔과의 만남으로 해서 입체주의는 미술의 역사를 선도하는 하나의 집단적운동으로서 출범하게 되었다.

 

한편 1907 년 피카소가 대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끝낸 해이기도 하거니와 이 작품 속에 이미 입체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조형적 시도와 그 가능성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아프리카 원시 조각의 영향이다. 그리하여 이 영향에 다시 세잔의 교훈을 되살리면서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성숙해 간다. 그리고 브라크 또한 세잔 회화의 본질을 연구하면서 조그만 큐브의 축적과 같은 엄격한 조형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입체주의 운동은 보통 다음의 세 단계로 구분된다. 1 기는 전기 입체주의, 2 기는 분석적 입체주의, 3 기는 종합적 입체주의이다. 이 세단계를 연대적으로 확연히 구분짓기는 어려우나 대충 제 1 기는 1907---09 , 2 기는 1910---12 , 3 기는 1913---14 년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종합적 입체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실험적인 파피에 콜레의 작품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세 단계를 거치는 입체주의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성은 그 전개가, 예컨데 야수주의와는 정반대로 명석한 논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또한 바로 그 논리성이 입체주의 회화의 기본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분석적 입체주의의 주역은 역시 피카소와 브라크다. 이 시기 동안 그들은 더없이 밀접한 유대 아래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또 실제로 그들의 작품이 서로가 누구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일한 문제를 공유하면서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 분석적 입체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은 대상의 해체와 그 해체된 대상의 자유로운 재구성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서 대상의 형상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며, 현실이 오히려 조형적 재구성의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은 필경 회화가 현실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 질서를 지닌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임을 주장하는 것이며, 여기에 또한 추상 회화의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 분석적 입체주의는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한 사람의 새로운 화가 후안 그리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말하자면 피카소와 브라크가 그때까지의 입체주의 회화의 대변자였듯이 종합적 입체주의의 대변자이며, 이는 그의 작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곧 종합적 입체주의 회화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석적 입체주의와 대비시켜 보았을 경우, 종합적 입체주의의 특성으로는 대체로 다음 몇가지를 들 수 있다. 색채의 부활, 지극히 단순화된 형태이기는 하나 대상의 형태으 재등장, 큼직한 색면에 의한 명쾌한 평면적인 구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그리의 작품을 특성 짓고 있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다시 한번 입체주의의 분석적 성격과 비교해 볼 때, 양자간의 차이는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분석적 입체주의에 있어 색채는 일종의 금욕주의에 가까운 단색조였고, 대상의 형태는 수정의 잘게 깎인 복잡한 면 속에 해제되고 따라서 화면 역시 입방체형으로 강조된 볼륨의 병치였던 것이다 입체주의에 있어서의 색채의 부활은 입체주의 자체를 크게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시에 그 시야, 이를테면 소재도 넓어지고 다양해진다. 이러한 확산된 의미의 입체주의를 전개해 나간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화가가 페르낭 레제, 로베르 들로네이다. 이 두 화가를 입체주의 화가라는 이름으로 묶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이 입체주의적 조형의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분명하며, 그 영향으로서는 일차적으로 대상을 자유롭게 분해시키고 다시 그것을 역시 자유롭게 재구성하는 방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러한 입체주의적 시각에 대담하게 색채를 도입했고 나아가서는 입체주의의 본래적인 특성의 하나인 부동성에 대신하여 화면 속에 역동감을 부어 넣으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이 역동감은 레제와 들로네에게 있어 그들의 시야를 근대 생활의 정경과 직결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정물을 위주로 한, 이를테면 실내악과도 같은 입체주의가 문명이라는 것과 합주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연대적으로 보아 입체주의는 하나의 집단적인 운동으로서는 1914 년에 일단 막을 내린다. 이는 제 1 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때를 같이한다. 그리고 종전 후, 입체주의는 이 운동을 주도했거나 이에 호응했던 주요 화가들의 입에서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다. 모두가 각기의 양식을 찾기 위해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그들의 회화 양식을 추구했든간에 입체주의적 체험이 그들의 밑거름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피카소 : , 1903, 66.1x 28.5, 클리브랜드, 클리브랜드 미술관

피카소 : 까마귀와 여인 1904, 톨레도 미술관,

피카소 : 유랑 곡예사 가족 1905, 워싱톤 국립 미술관

피카소 : 파이프를 든 아이 1905

피카소 : 두 누드 1906, 151x 93, 뉴욕 근대 미술관

피카소 : 아비뇽의 처녀들 1907, 243.8x233.7, 뉴욕 근대 미술관

피카소 : 호스타 데 에브르, 언덕 위의 집, 1909, 53x60, 상트 페테스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피카소 :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화 1910,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

피카소 :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1912, 27x34.9, 파리 피카소 미술관

피카소 : 쉬즈 병, 1912, 세이트 루이스 워싱턴 대학, 대학 미술관

피카소 : 눈물 흘리는 여인 1937, 런던 테이트 갤러리

피카소 : 게르니카, 1937, 마드리드 국립 미술관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

스페인 태생 20세기 최고의 화가. 세잔과 고갱, 로트렉을 좋아하고, 앵그르를 좋아함. 입체파의 대가. 초기는 청색시대 (1901-1904) 슬픔이 주조, 그 뒤에는 장미빛 시기 (1904-1907) 그 뒤 "흑인 미술 시대" 브라크와 함께 입체주의 시대 (1908-1912), 앵그르 시대 등 끊임없이 변화하며, 무대미술, 조각, 도기 등 각 분야에 독착성. 유품만 8만 여점.

 

1. 1901년부터 청색 시대. 주제는 주로 거지나 장님, 그리고 절앙적인 모자상 등이 주류를 이룸. 이 작품의 왼쪽 남자는 스페인 친구인카사메가스의 초상이며, 이 그림의 동기는 그의 자살에서 유래됨. 1901년 친구가 자살하자 그 주제로 여러편의 습작을 남김. 이 그림도 19세기 말 상징주의적 경향이 보임. 그의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토대로, 삶과 죽음, 모성, 절망적 사랑을 표현.

 

2. 1904년에 몽마르트 언덕에 이주하여 그린 그림. 젊은 화가들이 모이는 술집 탁자위로 날아다니던 까마귀를 작품화. 여자는 술집주인의 며느리인 마르고가 모델.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까마귀 쪽으로 기울이고 유난히 긴 손으로 어루만짐.

 

3. 예술가의 삶에 대한 주제. 19세기 예술가들의 모습과 20세기를 잇는 초기 작품. 천막을 친 서커스 단원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같은 예술가들의 불행을 작품화.

 

4. 1906년 비오는날, 우연히 길에서 주운 고양이를 갖고 가다, 물을 긷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여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거. 생활에 여유가 생김. 장미빛 시대로 불리워지는 시기의 그림으로, 주제도 가족들의 모습, 서커스 단원, 젊은 소녀와 소녀로 바뀜. 년초에 전시회도 성공. 아폴리네르가 피카소를 예찬함. 막스 자콥과도 교우. 시인들의 친구가 되던 시기의 그림.

 

5. 피카소가 올리비에와 함께 1905년 스페인의 고졸(Gosol) 지역을 여행하며, 원시 조각의 조형미를 발견. 스페인이 로마의 영토가 되기전 고대 이베리아 지역의 조각들을 보고 그 원시적인 형태에 매료. 파리로 돌아와 그린 그림으로, 두 명의 창녀가 커튼 사이로 고객을 내다 보고 있는 있는 장면. 두 인체는 비례나 조형적 특징에서 서양 미술의 전통에서 벗어나 몸체가 육중하고 경직된 팔다리로 이루어짐.

 

6. 입체주의의 시작이 된 작품. 가로 250x 세로 230의 대작. 제목은 피카소의 동료인 앙드레 살몽이 피카소의 스페인 시절의 유명한 매춘굴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 주제는 앵그르의터어키의 목욕과 세잔의다섯명의 목욕녀들에서 영감 받음. 왼쪽에서 들어오는 누드는 커튼을 치켜들어 정면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는 창녀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관람자들을 그녀들의 고객으로 만들고 직접 마주보게끔 강요함. 특히 오른쪽의 두 누드는 강렬한 테라코타 색채와 난폭할 정도의 야만적인 얼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가면에서 영향. 그림을 완성하기전 우연히 인류학 박물관에 들러 아프리카 조각을 보고 영감을 받음. 전통 회화와 비교하여 이 그림에서는 원근과 공간 개념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인체와 인체 사이의 공간은 그 자체로서의 형태를 갖고, 중심공간과 주변 공간이 똑같이 중요한 요소. 시간 개념에서도 오른쪽에 앉아있는 누드의 목과 몸은 서로 다른 시점에서 보여진 모습이 하나의 인체로 종합. 르네상스 이후의 회화개념인 한 순간에 하나의 시점에서 본 자연의 묘사라는 개념을 깨트림.

 

7.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 작품. 브라크의 영향으로 풍경화라는 소재를 택함. 구성이 아래에서 위로 치켜올라가는 효과를 가지고 있고, 또 그림의 가장자리가 선적인 특징을 보이고, 면의 투명도와 명암의 조정이 달라짐.

 

8. 화상의 초상화. 사람들은 이해 못함. 대상을 샅샅이 뒤져내 보편성을 추구. 이 그림이 전시 된 화랑에서 어른들은 유리파편의 집합같은 이 그림을 이해 못함. 그 중에 아빠를 따라온 4살 어린 아이가 이 그림을 보고, “이 사람은 볼라르 아저씨네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음.

 

9.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로 세부적인 분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꼴라주(Collage), 즉 화면에 물감이외의 신문지, 벽지, 천 등 이물질을 도입. 꼴라주와 파피에 꼴레의 차이는 꼴라주가 기존의 화면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요소를 집어넣음으로써 화면에서 양식적인 분열이 일어나지만, 파피에 꼴레는 종이를 풀로 화면에 붙일 때 기존의 화면 양식과 조화를 이루는 기법임. 이 작품은 등나무 의자 무늬로 착각하게 처리된 유포를 화면에 붙인 피카소 최초의 꼴라주. 탁자는 보는 사람에게 정면으로 보이게 기울어져 있고, 중앙에 술잔, 오른쪽에는 칼의 손잡이와 레몬, 그 밑에는 조개가 있음. “르 주르날이라는 신문 위에는 관람자 쪽으로 튀어나온 파이프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음. 그리고 화면 아래에는 등나무로 엮은 듯한 무늬가 찍혀진 유포가 붙여져 있음. 로프는 그림의 프레임이 되어주면서 탁자의 가장자리를 의미하는데, 당시 피카소 스튜디오에 같은 술이 달린 탁상보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로프는 선원이 쓰는 거울의 가장자리에 달기도 했기 때문에 거울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음.

 

10. 1912년 파피에 꼴레에 몰두하여, 종이에 목탄을 사용한 파피에 꼴레 작품. 당시 발칸 전쟁과 건강과 관계되는 신문 기사를 이용. 쉬즈는 아페리티프의 일종.

 

11. 피카소의 연인들, 도라마르, 프랑수와 질로, 자클린 질로등 여러 여인. 도라마르의 초상화. 매력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닌 절망하는 여인의 모습. 가학적인 피카소의 태도와 그것을 표현하는 색채의 힘.

 

12. 1937년초 만국 박람회 스페인 관의 벽화 의뢰를 받고 주제를 구상하던 중, 4 26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가 프랑코군에 가담한 나찌에 의해 무차별 폭격된 뉴스(사망자 654, 부상자 889)를 접하고, 크게 분개하여 4주만에 완성한 작품. 입체주의이후 신고전주의적 기법과 백..흑색의 단순한 색채로 비극성을 강조한 그림. 반파시즘의 상징으로스페인에 진정한 공화국이 탄생할 때까지란 조건으로 뉴욕 근대 미술관에 대여. 몇차례의 교섭이 있었으니 실패. 1981년 스페인에 반환. 피카소 탄생 백주년을 맞아 프라도 미술관에서 일반 공개.

 

브라크 : 목욕하는 여인 1907-1908, 140x99.1, 파리, 개인 소장

브라크 : 레스타크의 집 1908, 베른, 베른 미술관

브라크 : 테노라가 있는 정물, 1913, 뉴욕 근대 미술관

 

 

 

죠르쥬 브라크 (Georges Braque 1882-1963)

야수파로 시작. 세잔과 피카소를 발견. 입체주의 시작. 대상을 기하 형태로 해체하고, 원근법의 부정, 색채도 화면의 구성요소로 생각하여 재조직하고 재구성하는 기법. 1차 대전 후에도 입체주의를 지킴.

 

13. 1907년 피카소의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충격을 받음. 이전과는 달리 대형 캔버스를 사용하고, 그림처럼 인체의 왜곡과 규모, 색채의 제한, 각이 진 면으로 나뉘어진 배경, 다각도의 시점등 아비뇽의 처녀들과 유사점이 많음.

 

14. 1908년 세잔의 조형적 탐구에 몰두. 첫 그림에서 전경에는 나무, 중경에는 집을 배치. 지붕, , 나무들은 하나하나의 대상으로 구별되고, 자연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음. 그러나 하늘은 없어지고 공간은 압축. 색채는 자연적인 색채와 광선에서 벗어나고 형태는 논리적인 원근법에서 벗어남.

15. 95.2x120.3의 대작 파피에 꼴레임. 화면은 맨 아래에 검은 종이, 그위에 나뭇결을 모방한 종이, 그리고 누런 종이 맨 위에 신문 조각 순으로 붙여져 그 자체로서 부조를 이룸. “에코라는 단어는 메아리의 의미로 악기의 음향을 느끼게 함.

 

 

레제 : 숲속의 나신 1910, 120x169.9,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박물관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

노르망디 태생,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야수파, 세잔, 입체주의 등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이룸. 메카니즘에 관심을 갖고 색채는 적색, 청색, 녹색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조이고 형태는 프리즘이나 미래주의 경향이 강함. 그림 초년 시절에는 몽파르나스에서 생계를 잇기 위해 고양이를 잡아먹고, 코로의 모작을 그려주는 생활을 했고, 1940년에는 예일 대학 시간 강사를 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함.

 

16. 초기 작품으로 세잔느의 영향이 두드러짐. 나무둥지는 원통화되었고, 땅과 수풀은 세명의 누드와 유사한 색채와 형태로 변화되어 분간하기 어려움. 세 누드는 나뭇꾼들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체의 조형과 움직임임.

 

들로네 : 에펠탑 1910, 202x138.4,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들로네 : 파리시 1910-1912

들로네 : 블레리오에게 바치는 경의 1914, 바젤, 바젤 미술관

 

 

들로네(Robert Delaunay 1882-1941)

파리 태생, 입체주의로 시작, 순수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면서 추상적 회화에 이름. 아폴리네르는오르피즘으로 명명됨

 

17. 1912년 죽음을 앞 둔 두아니에 루소는로베르가 에펠탑을 부수어 버리지 말아야 했을텐데라는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함. 들로레는 에펠탑의 찬미자로 루오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300미터의 탑을 분해해 그림. 실물을 따르면 탑의 웅장한 맛이 없고, 원근법을 쓰면 양감이 살아나지 않아 10개의 다른 시점과 다섯 종류의 원근으로 어느쪽은 올려다 보이는 시점, 어느 쪽은 내려보는 시점등을 사용하여 그림.

 

18. 폼페이의 벽화에 나타난 삼미신을 주제로 창밖으로 본 파리시가 복합된 작품. 앞의 그림과는 다르게 색면의 상호 관계가 두드러짐. “나는 슈브렐의 과학적 용어를 채용하였다. 동시 대비“. 나는 음악에서처럼 색채의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라고 함.

 

19. 250x251.5의 대작. 도버 해협의 횡단에 성공한 프랑스의 비행사 루이 브레이오를 위해 그려진 작품으로, 화면에는 에펠탑과 무수한 동심원들로 이루어진 색면 구성이 펼쳐진다. 공간 가운데의 원 운동은 들로네의 조형성의 특징이며, 동심원들이 비행기 프로펠러의 회전 이미지를 유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