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야수주의가 태어난 1905년, 같은 해에 독일의 드레스덴에서는 네사람의 젊은 화가들이 다리그룹을 결정했다. 다리라는 명칭부터가 새로운 예술에로의 다리를 놓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그룹의 주역은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이며, 그 이듬해에는 에밀 놀데가 이에 참가한다. 그리고 이들이 곧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첫 물결을 형성시킨다. 그러나 이 표현주의 경향은 본래가 게르만 민족 고유의 특성으로서 독일 미술의 하나의 전통의 기틀이기도 하다. 예컨데 프랑스를 포함한 라틴 민족에 있어서는 명쾌한 형태와조형 질서가 미술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면, 게르만 미술은 신비와 고뇌, 그리고 그 어떤 형이상학적 불안으로 물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다리 운동은 직접적으로 독일에 뒤늦게 풍미하기 시작한 인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프랑스의 야수주의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 원색의 범람, 난폭한 필촉, 기법의 단순화 등이 그 공통점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근본적인 차이점도 많다. 그 근본 원인은 아마도 민족성의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겠으며, 또한 두 회화운동의 사회적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다리 운동에서 비롯된 독일 표현주의는 일군의 선구자를 가지고 있다. 반 고흐를 위시해서, 노르웨이의 에드바르트 뭉크, 벨기에의 제임스 앙소르 등이 그들이다. 제임스 앙소르의 표현주의 경향에는 풍자적인 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그 풍자는 때로는 사회적인 풍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풍자성은 흔히 으시시한 환상적 성격을 띠고 나타나며 그리하여 환상과 현실이 서로 탈을 바꾸어 쓴 듯한 기이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와 같은 북유럽의 세기말 화가들의 계보 위에 선 다리 그룹의 화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는 동료 화가들보다 거의 한 세대 연장자인 에밀 놀데이다. 원래 종교적인 성향이 짙은 그는 남달리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데포르마숑(déformation)과 생략으로 강력한 표현력을 얻어, 때로는 자연의 신비를 때로는 인간 영혼의 심연을 그리고 있다. 이에 비해 루드비히 키르히너는 근대 문명과 대결하여 그 모순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근대 문명에 의해 말살되어 가고 또 메카니즘 속에 묻혀 가는 시대상을 그는 특유의 예각적인 선으로 파헤친다.
독일 표현주의의 제 2 의 물결은 1911 년, 뮌헨에서의 청기사 그룹의 결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 그룹 결성의 주역은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이며, 곧 이어 여기에 파울 클레가 합세한다. 그러나 이 제 2 의 물결과 함께 표현주의 자체의 양상도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칸딘스키의 첫 추상 콤포지션이 제작된 것이 그 일년 전인 1910 년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청기사 운동은 다리 그룹처럼 격정적인 인간 내면의 표현보다는 보다 더 조형적인 혁신이라는 문제점에 주안점을 둔 운동이었다.
프란츠 마르크는 아마도 청기사 운동의 이념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화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형태의 단순화와 그것을 더욱 강조하는 강렬한 색채의 통합은 매우 야심적인 시도였으며, 만일 그가 한창 나이에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았던들 그의 그 조형적 시도는 큰 결실을 맺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울 클레를 표현주의 화가로 간주할 수 있느냐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천의무봉의 자유자재한 그리고 그칠 줄 모르는 환상과 시정, 또 그것을 완전무결하게 통어할 수 있는 투철한 조형 의식, 이런 것들은 넓게 해석해서 청기사의 이념과 일치할는지도 모른다. 청기사 운동은 바실리 칸딘스키에 의해 그 이념이 제창되었고 또 그 자신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제창한 이념은 한마디로 철저하게 비재현적인 색채의 자율적 표현력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스스로가 느끼는 감동을 그 어떤 구체적인 형태에 위탁함이 없이 색채 자체로서 표현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태어난 것이 이른바 내적 필연성의 표현이며, 그리하여 그 표현은 색채에 의한 추상, 즉 추상 표현주의의 원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내밀한 환상의 화가, 우리에게 환상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환상을 이끌어 주는 화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의 기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선적인 것, 얼룩진 것, 그리고 사실적인 것 등이다. 이 중 선적인 그림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특히 키르히너등의 다리파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놀데의 종교적인 주제, 페히슈타인과 키르히너 등의 유토피아적인 주제, 신즉물주의의 딕스나 그로츠의 사회비판적인 주제, 벡크만과 마르크의 상징적인 주제, 코코슈카의 비관적인 인간심리 주제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뭉크 : 여자 가면 아래의 자화상 1891-1892
뭉크 : 외침(절규) 1893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천재로 일컬어짐. 표현주의의 선구자. 가정환경으로 어머니와 누나가 폐결핵으로 사망. 감수성이 빠르고, 병약하고 고독한 성격이 드러남.
1. 여자 가면 아래의 자화상
붉은 벽면 위에 여자의 커다란 마스크가 걸려 있고, 중심을 약간 벗어난 위치에 자화상이 있음. “나와 가정는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을 이길 수 없었다”고 고백하듯이 뭉크는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부친의 비정상적인 성격과 자기를 포함한 가족이 병을 앓고 있는 환경 속에서 내성적인 뭉크는 어떤 숙명이나, 운명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 마스크는 그의 운명의 상징이 아닐까?
2. 절규
화면 하부 중앙에서 두 손을 볼에다 대고, 눈을 크게 뜨고, 소리는 지르는 인물. 원근법적인 구도에 화면을 비스듬히 구획하는 다리와 난간, 뒤쪽에 보이는 길쭉한 두 인물이 보이고 노랑, 빨강, 파랑의 원색을 강렬하게 사용한 배경과 리듬감 있는 곡선과 폭넓은 곡선의 대비는 아르 누보(유겐트 슈틸)의 전형임. 후미에 떠 있는 두척의 배 이외에는 완전하게 세부를 생략하여,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 주변은 평온하고, 주위 사람들은 무관심할 때 쓰기는 불안감을 극적으로 표현. 뭉크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껴서 노트에 “두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저물었다. 나는 우울증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우뚝 서 버렸다. 죽을 것같이 피곤해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검푸른 도시의 피오르드(바닷물이 육지에 들어오는 협만)에 피와 칼같이 걸린 타오르는 구름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무서움에 떨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을 찌르는 크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고 술회.
제임스 앙소르(1860-1949)
벨기에 출신의 화가. 고향 오스텐드에서 본 마스크와 인형등을 작품속에 투영하여, 플랑드르의 화가인 보쉬나 브뤼겔의 전통을 이음. 그에게 마스크는 위협적이면서 동시에 마스크를 쓴 사람의 정체를 감출 수 있다는 점에서 숨겨진 욕구나 의식의 반영물로 등장.
3. 제임스 앙소르 : 브뤼셀에 예수의 입장 1888.
1888년의 256x378의 대작으로 주제는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주제. 종교적인 축제는 군중의 히스테리에 찬 사회주의 축제로 변모. 예수는 행렬 뒷쪽에 나타남. 그의 머리위에는 사회주의 만세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그리스도는 존재하지만 그가 중심이 아니라 압도적인 군중들에 의해 무시당함. 강렬한 원색은 눈을 피로하게 하고, 마스크를 쓴 군중들의 혼란함을 느낄 수 있음.
키르히너(1880-1938)
드레스덴 공과대학에 입학한 건축학도. 기하학, 수학, 건축디자인 등을 공부. 1904년 뮌헨에서 로트렉과 시냑의 그림을 보고, 돌아와서 다리파를 결성
4. 키르히너 : 일본 우산 밑의 여인 1909, 92.7x80.3,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 소장
1909년 작품으로, 여인 누드가 화면을 가득히 채우면서 관람자는 마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을 갖게 됨. 전통적인 누드와는 달리 야만적이고 불건전한 분위기가 느껴짐. 이는 인간의 형체가 비정상적으로 과장된 데서 유래하고, 또 강렬한 원색들이 서로 조화하기보다는 충돌하고 긴장감을 조성함. 물감은 마치 엎질러진 것처럼 얼룩지게 번져있어 여인의 야한 분위기를 강조함. 여인은 더운 노랑색과 붉은 색채로 채색되고, 주변은 차가운 청색으로 채색됨으로서 더운 열기는 가라앉지만 배경의 노랑색과 붉은 색은 다시 화면 전체를 격렬한 에너지로 바꾸는 분위기임.
5. 키르히너 : 거리, 베를린 1913, 120.7x91.1, 뉴욕, 근대미술관
1911년부터 베를린에서 활동. 입체파의 영향을 받음. 이 그림에서는 날카로운 각진 선들이 V, A, N, M, 같은 형태의 표면구조를 이룸. 붓의 방향도 여러 번에 걸친 대각선의 빗금으로 뾰족하게 처리되어 얼굴과 다리 형태를 강조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줌. 우아하고 세련된 남녀들은 극적으로 축소된 원근법에 의해 비례가 왜곡되었고, 표면적인 화려함은 화합되지 않는 색채와 리듬으로 불안정함을 동반함.
에밀 놀데(1867-1956)는 다리파의 다른 회원들보다도 20세 연장자. 특히 그의 그림은 190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종교화가 특징임. 앙소르, 루오, 고갱등과 함께 현대 회화사에서 종교화가로 알려짐. .
6. 놀데 : 촛불을 들고 춤추는 여인들 1912, 100x85, 제뷜, 놀데재단
종교화를 그리던 시기에 놀데는 춤추거나 노는 모습을 제작.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빠른 리듬과 광란의 움직인은 육체적, 정신적 감정 분출의 적절한 표현주의적 주제가 되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충동과 본능을 찬미. 당시에 놀데는 민속박물관에서 원시조각을 보고 영감을 얻음.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오스트리아 태생. 1904년 비인 공예학교 수학. 1910년 베를린으로 옮겨 심리적 표현의 초상화를 제작. 1919년 드레스덴 미술학교 교수. 37년에는 비인 회고전에서 417점의 그림이 나치에 의해 몰수당함. 풍경화보다는 인물화에 독창성이 뛰어남. 데뷔부터 “화단의 테러” 또는 “미친 코코슈카‘로 불리고 사인은 OK로 함. 주제는 폭력적인 성(性)이나 남녀곤게의 심리, 인간 영혼의 비극적 상태나 죽음임.
7. 코코슈카 : 폭풍 1914, 181x 220, 바젤, 바젤 미술관
자신의 자서전적인 그림. 그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Alma Mahler)의 초상화.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미망인이었으며, 여러 남성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던 그녀는 코코슈카와 3년에 걸친 연애를 하였으나, 결국 건축가 월터 그로피우스를 택하여 떠나감. 이 그림에서 두 남녀는 마치 우주적 소용돌이 같은 소요와 극적 긴장 속에서 서로에게서 안식을 구하는 모습.
8. 코코슈카 : 붉은 계란 혹은 유럽 분할 1940
1934년 부상하는 나치즘을 피하여 체코의 프라하로 이주하여 그림을 그림. 거기서 동반자가 될 올다 팔코브슈카를 만나 영국으로 이주. 1938년 프랑스와 영국이 뮌헨 조약으로 체코를 히틀러에게 넘겨주는 사건을 풍자한 그림. 히틀러와 무솔리니로 풍자된 이태리와 독일, 삼색깃발을 과시하는 고양이로 표현된 고양이, 그리고 꼬리를 영국의 파운드 형태로 말아올린 사자 모습의 영국. 이 네 주인공이 체코를 상징하는 닭요리를 먹기 위해 식탁 주위에 앉아 있는데, 정작 제물인 닭은 빨간 계란만을 낳아놓고 도망가는데 성공. 이 그림을 통해 4개국이 체코의 폐망에 책임이 있음을 상징. 배경은 불에 휩싸인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모습이고 중앙에는 뮌헨 조약을 새겨넣음으써 영국과 프랑스의 표리부동함을 상징.
프란츠 마르크(1880-1916)
독일 뮌헨의 화가로 전원생활을 좋아하여 동물을 기르고 살면서 전원 풍경을 주로 그림. 칸딘스키와 함께 청 기사파 회원. 어린이들 미술과 원시미술을 찬양. 낭만주의적이고 정신주의적. 그에게 동물은 자연의 상징. 인간이 상실한 순수성의 상징으로 동물과의 교감에 대해 그림의 주제로 삼음.
9. 마르크 : 푸른 말, 1911, 103.5x180, 미니애폴리스, 워커하트 센터
그의 동물에 대한 관심은 1907년 동물 강의학을 강의하면서 생기고 1909년 이후에는 거의 동물화만을 그림. 동물 중에 특히 말에 관심이 많음(제리코와 비교). 이 그림에서처럼 완전히 객관적인 묘사에서 떠나 추상적인 형태와 곡선으로 자연과 동물의 화음을 추구. 색채는 노랑과 빨강, 그리고 파랑색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그는 “파랑색은 정신적이고 엄격하고 남성적 원리에 입각하며, 노랑은 부드럽고 유쾌하며 감각적이고 여성적 원리에 입각한다. 빨강은 물질의 상징이며 거칠고 무겁다”고 주장.
10. 마르크 : 숲속의 사슴 1913-1914
1912년 파리에 가서 들로네를 만남. 그의 색채 병렬에 의한 광선과 구조에 영향을 받고, 화면의 색채를 파편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옴. 이 그림에서처럼 색채는 파편화되어 스테인드 글라스의 효과를 나타냄.
11. 마르크 : 싸우는 형태들, 1914, 91.1x 131.4, 뮌헨, 주립근대 미술관
일차대전을 앞두고 지식인들은 당시 세계에 대한 불만과 재앙이 다가 오고 있다는 믿음이 팽배해 있었는데 마르크는 이 그림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오기 위해서는 현세를 끝내야 한다는 사고를 반영. 오른쪽의 무겁고 차고 어두운 청색과 왼쪽의 가볍고 뜨겁고 밝은 붉은 색이 충돌하고 있음. 마르크는 1914년의 글에 “세계는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킨다. 이제는 단 한가지 의문만이 남아있다. 구 세계가 와해될 시기가 지금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새 생활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가장 긴박한 질문이다”라고 적음. 이러한 의문을 갖고 전쟁이 발발하자 자진 입대하였으나 결국 1916년에 전사함.
칸딘스키 (1866-1944)
모스크바 태생. 30세를 넘기면서 뮌헨에서 화가의 길로 들어섬. 1909년부터 객관적 자연묘사에서 벗어나 순수한 추상의 길을 모색. 1911년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 그룹을 만듬. “청기사”란 명칭은 칸딘스키가 좋아하던 기사의 모티브와 마르크가 좋아하던 청색이 합쳐진 이름이며, 동시에 청색으로 상징되던 정신성과 묵시록에서 나타나는 네 기사를 연상시킴. 그래서 작가의 내적 감정이 어떻게 새로운 회화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가를 실험하려는 그룹. 종합 예술의 성격을 띄었지만 특히 주된 관심은 음악이었음. 색채화음과 순수 음악의 화음과의 유사성을 찾으려 했던 칸딘ㅅ스키의 개인적인 관심이 나타남. 그는 회화적인 형태란 내면의 표현이라고 보았고 외부의 세계보다는 내면의 세계에 귀를 기울여 내적인 생명을 표현하려고 함. 1921년 바우하우스 교수가 되고 33년 파리로 이주 44년에 죽음. 색채의 이론의 두 축은 뉴튼의 이론에서 연유한 순수한 망막에 비친 색으로 파랑, 빨강, 노랑등의 보색대비 및 동시대비 효과에 근거를 둔 것으로 슈브렐의 영향을 받은 점묘주의와 현대 생활의 역동성을 표현한 들로네가 여기에 속하고, 또 다른 개념은 괴테에서 나온 것으로 영혼을 그 인식의 대상으로 하고 있음. 칸딘스키는 후자에 속함.
12. 칸딘스키 : 잡다한 인생 1907, 130x162.5, 뮌헨, 렌바흐하우스
초기 모색의 시기 작품으로 유화와 템페라, 풀, 또는 계란 등의 다양한 시도를 한다. 이 그림도 두꺼운 검은 색 종이 위에 템페라로 모자이크 형태의 색을 점점이 채색함. 칸딘스키는 이러한 작품을 색채 드로잉(Color Drawing)이라고 불렀는데, 주제는 대개 밤, 겨울, 이별, 월광, 검은 고양이 등 낭만적이고 상상적인 주제를 그림.
13. 칸딘스키 : 즉흥 19, 1911, 120x141.5, 뮌헨, 렌바흐하우스
1910년부터 그의 작품은 대개 인상(Impression), 즉흥(Improvisation), 구성(Composition)의 세가지로 분류. 음악적인 제목은 음악이 그 연속적인 특징 때문에 감명을 효과적으로 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채택하고, 미술이 더 이상 묘사적 언어의 도움이 필요없이 그 자체로서 충족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옴. 1909년부터 시작된 1913년까지 34점의 즉흥의 연작은 내면 세계의 무의식적인 흐름이 자발적으로 표현된 작품. 표현주의에서 추상에로 변화하는 시기로 이 그림에서도 구체적인 이미지는 나타나지 않음. 단지 화면 오른쪽과 왼쪽에 기울어져 있는 인체의 무리가 연상되지만 내적 율동이 선으로 표현됨.
14. 칸딘스키 : 구성 V, 1911, 190x275, 스위스, 개인 소장
이 작품도 종교적인 주제의 하나. 1914년 쾰른의 강연에서 이 작품은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명명함. 눈에 띄는 것은 오른족 우에서 검은 리본같이 중앙을 가로 지르는 검은 곡선인데, 그는 “검은 색은 새로운 시작이나 가능성이 전혀 배제된 것과 같이 모든 것이 죽은 상태와 같다”고 함. 이 형태는 암울한 전조를 예고하고, 그외에 중앙의 산이나 산 위의 탑, 오른쪽 아래의 인물, 왼쪽의 보트역시 암시적으로 표현. 이와같은 그림에 대한 그의 의견은 1910년에 집필하고 2년 뒤에 발간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 자세하게 표현됨. 추상미술의 기초개념이 되는 글.
15. 칸딘스키 : 점 위에, 1928
1926년 “점.선.면”을 출판하고 60세를 맞은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의 부교장으로 그로피우스를 보좌함. 이시기의 특색은 원을 화면에 클로즈업 시키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의 직선이 이루는 조형적인 음악세계임. 수평선상의 세 개의 지점에서 나온 몇 개의 직선은 여러개의 삼각형을 형성하면서 마치 부채살처럼 공간에 확산. 삼각형과 원을 가로지르는 직선들이 서로 얽히면서 반향하는 조형적인 전개는 한편의 교향악이라 할 수 있음.
파울 클레 (1879-1940)
클레는 1879년 스위스의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8년 화가가 되기 위해 뮌헨으로 가기로 결심하지만, 음악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중요한 일부로 남아 있었다 클레는 매우 독립적인 작업을 하였고, 1911년까지 가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때 칸딘스키와 마르크를 만난다. 클레는 그들의 관심에 의해 힘을 얻었고, 그와 동일한 목표를 가진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기뻐하며 '청기사' 그룹에 가담하였다. 1914년에는 북아프리카를 여행하였는데, 그곳의 빛과 색채에 큼 감명을 받았다. 클레의 작품은 칸딘스키와 청기사의 영향뿐 아니라 브라크와 피카소 등 큐비즘의 영향도 있었다. 그의 작품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클레 특유의 추상성과 장식성, 변덕스러움과 우울함은 그의 음악과 여행, 예술가로서 스스로의 교육, 그리고 특유의 유머 감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클레는 1920년까지 이룩한 직업상의 명성으로 바이마르에 있는 바우하우스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예술가로서 해야할 중요한 일과 가르치는 임무와의 갈등으로 1931년 바우하우스를 떠난다. 당시 나치 정권의 정치 풍조에 혐오를 느낀 클레는 1933년 12월 스위스로 돌아왔다. 나치는 1937 년 뮌헨에서 열린 <퇴폐 미술전>에 클레의 작품 17점을 포함시켰다. 또한 같은 해에 나치는 독 일 도처에 있는 공공 소장품 중에서 현대 미술품들을 압수했는데, 거기에는 클레의 작품 102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클레는 194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16. 파울 클레 : 죽음과 불 1940
말년의 작품으로 중앙에 희미하게 하게 빛나는 해골의 모습을 독일어 죽음(Tod)이 만든다. 축소된 인간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그는 얼굴도 사람의 형체도 없다. 죽음만이 무덤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지지 않은 불, 태양이 땅의 테두리, 즉 죽음의 손 위에 얹혀있다. 윗부분은 불의 빛으로 빛나고, 사람은 당당하게 빛속으로 걸어간다. 녹갈색의 죽음은 빛을 받아들인다. 미지의 세 개의 선이 위에서 내려오고 또 다른 선으로 인간은 죽음을 건드린다. 운명에 의해 죽게 된다면 인간은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반원의 죽음과 완전한 원형인 태양의 대조. 외부적인 사실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한 클레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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