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파(Fauvisme) 화가들
야수주의는 흔히 20 세기 미술에 있어서의 회화적 혁명의 첫 봉화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우리는 야수주의와 함께 20 세기 회화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이 회화 운동은 어떤 특정한 이론적 주장을 앞세운 운동이 아니라, 일군의 화가들간의 우정과 젊음의 정열에서 오히려 자연 발생적으로 태어난 운동이다. 그리고 그들이 더불어 나눈 정열이란 다름 아닌 색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 만큼 단명한 회화 운동이기도 했다.
야수주의의 탄생은 1905 년의 살롱 도톤느(가을 전람회) 에서 극적인 형태로 탄생한다. 야수주의라는 명칭은 이 살롱 도톤느에 출품된 마르케의 청동조각을 보고 비평가 루이 복셀 (Louis Vauxcelles) 이 "야수의 우리 속에 갇혀있는 '도나텔로' 같다" 고 평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 해의 살롱 도톤느의 한 전시실에 강렬한 원색과 분방하고 거센 필촉으로 화면을 메운 일련의 작품들이 자리를 같이하고 전시되었다. 실상 그 작품들은 [야수처럼 울부짖는 듯한]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그 전시실에 출품한 젊은 화가들이 바로 앙리 마티스를 비롯하여 피에르 마르케,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라울 뒤피, 에밀 프리에스 등등이며 그들이 다름 아닌 야수파화가들인 것이다.
이들 야수파 화가는 다같이 원색적인 색채에 대한 정열을 나누었다고 했거니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들은 색채에다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려고 했다. 그 기능이란 색채가 본래 지니고 있는 색채 자체로서의 표현성을 되찾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색채를 이른바 재현적인 기능에서 완전히 해방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색채는 이미 자연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인 가치와 독자적인 질서를 가지게 되었다. 야수파 화가들 중의 가장 연장자이자 이 운동의 실질적인 주도자인 앙리 마티스는 야수파의 회화를 가장 순수한 상태로 완성한 화가이다. 다시 말해서 색채가 갖는 표현성과 조형성을 완벽하게 통합한 화가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에게는 색채의 표현성과 조형성은 같은 의미의 것이었다. 그는 색채의 조화에 의해 균형 잡힌 구도에 도달했고, 그 경우 그의 작품은 바로 색채의 화음의 마당이 된다. 그러나 마티스는 단순히 뛰어난 색채가로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뛰어난 선묘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색채끼리의 화음에서 다시 색채와 데생의 화음, 이 양자의 통합을 달성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가장 뛰어난 예가 바로 후년에 즐겨 제작한 파피에 콜레 작품들이다.
한편 파리 근교에서 공동 아틀리에를 쓰면서 야수주의의 기치 아래 모였던 두 화가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드 블라맹크는 그들 역시 야생적인 색채의 향연에 도취했으나 서로의 개성은 극히 상이했다. 드랭이 보다 이지적이고 탐구적이라면 블라맹크는 야수 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야수라는 평을 받았듯이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색채에 있어서도 전자의 경우는 보다 계산되고 장식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오히려 표현주의적인 난폭한 감정 표출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그들은 1908 년을 전후해서 야수주의를 포기하고 한사람은 고전주의로, 또 한 사람은 세잔풍으로 되돌아간다.
이들과는 달리 마티스처럼, 야수주의를 독특한 방식으로 밀고 간 사람이 있으니 그가 르 라브르 출신의 라울 뒤피이다. 그는 뛰어나게 세련된 경묘한 색채 감각과 함께 재빠른 선묘에도 뛰어났으며, 그 간결한 선묘에 얹혀진 색채는 어떤 재현적인 기능을 떠나 그 자체의 순도로써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끝으로 야수파 화가들과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화가가 죠르즈 루오이다. 마티스 등이 분방하고 강렬한 색채에 대한 정열에 그들의 젊음을 바치고 있었을 때, 그는 구제 받지 못할 비참한 숙명의 인간상에 눈을 돌렸다. 그는 창녀, 광대, 인간이 인간을 재판해야 하는 재판관 등등의 테마를 되풀이하여, 마치 그의 분노를 화필에 위탁한 듯 거친 채색과 난폭한 필촉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이 일련의 그림은 표현상의 수법과 주제 설정에 있어 표현주의적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그러나 이 격렬함은 차츰 자취를 감추고, 신에의 경건한 귀의라는 종교적 정신 속에 그의 회화는 일종의 성스러운 고요함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정신성은 다시 내면적인 광휘에 찬 색채와 흔들림 없는 조형아 결합되어 20 세기 회화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종교화를 창조해 내었다.
앙리 마티스(1869-1954)
신인상주의와 반 고호의 영향을 받음. 곧 이어 들라크르와와 앵그르를 연구. 아프리카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입체파에 영향 미침.
마티스 : 후식, 1897, 73.3x100.3 개인소장
마티스 : 스튜디오의 누드, 1899, 65.4x49.9 동경 이시바시 재단, 브리지스톤 미술관
마티스 : 정물, 1901, 51x61.5, 상트 페테스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마티스 : 사치, 고요, 관능 1904-1905, 98.5x118, 파리, 퐁피두센터
마티스 : 열려진 창 1905, 55.2x46, 뉴욕, 존 헤이 휘트니 부부 컬렉션
마티스 : 모자 쓴 여인 1905, 81.3x 60.3, 개인소장
마티스 : 초록색 줄무늬가 있는 초상화 1905, 40.3x 30.7, 코페하겐, 국립미술관
마티스 : 청색누드 1907, 92.1x142.5, 메릴랜드 볼티모어 미술관
마티스 : 빨간색의 하모니 1908, 181x 246.1, 상트 페테스부르크 미술관
마티스 : 대화 1909, 상트 페테스부르크 미술관
마티스 : 춤 1910, 상트 페테스부르크 미술관
마티스 : 피아노 교습, 1916
마티스 : 춤 (부분) 1931-1933, 펜실바니아 주 메리온, 반스 재단,
1. 1897년 초기 작품으로 ‘살롱 나시오날“에 출품. 당시 루브르에서 모작한 20여점의 대가 작품중 3분의 1이 정물화로 당시 정물화에 관심이 많음. ’후식‘은 중산층의 한 여인이 식탁을 꾸미고 있는 모습으로 주제나 붓터치가 나비파인 뷔야르와 보나르를 연상시킴. 눈 앞에 놓여진 정물과 그것을 비쳐주는 광선의 효과를 전달하는 세밀한 묘사가 뛰어남.
2. 초기 야수파의 기법이 드러남. 강렬한 색채의 사용. 여인의 인체는 색채에서 해방되어 주홍색으로 채색되어 있고, 주위 배경은 사실적인 색채와는 무관하게 임의로 선택된 색채. 어둡고 밝은 색채의 대비에서 오는 인체의 입체감보다는 따뜻하고 찬색의 대비에서 오는 입체감.
3. 정물은 코르시카 여행후 과감한 색채가 두드러진 그림. 화면 구성은 후식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대각선의 시점이지만 대담한 색채 대비는 거칠고 두꺼운 물감을 사용하여 표현주의적인 성향을 나타냄. 이는 그가 6개월간 머물렀던 지중해 연안의 색채의 경험에서 오는 것으로 보임.
4. 1905년 앵데팡당전에 출품한 “사치, 고요, 관능”은 앞의 그림을 발전시켜 신인상주의 기법이 두드러짐. 제목은 보들레르의 시 “여행에의 초대 Invitation au voyage”에서 마지막 구절 “그곳에는 모든 것이 질서, 아름다움, 그리고 사치, 고요, 관능일 뿐이니”라는 구절에서 따옴. 앞의 주제에 여러 누드를 첨가시킴. 세속적인 세계와 이상적인 세계의 추구는 서양화 전통에서, 16세기 티치아노, 18세기 와토, 그리고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등에서 나타남. 점묘사용이 뛰어나 시냑이 작품을 구입함. 그러나 마티스는 점묘파에 만족하지 않음. 점묘파의 기법에 굵은 선이나 곡선 등을 사용하고, 색채가 모델링의 기법보다는 분홍, 노랑, 파랑 등의 순수 색채의 배합으로 묘사적인 기능에서 벗어나 표현적이고 장식적인 기능이 두드러짐. 이 작품이후 신인상주의에서 멀어짐.
5. 1905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 소재는 인상주의와의 연계가 있고, 그 후에도 창이라는 주제를 많이 그림. 이 그림은 일상적인 분위기라기보다는 창밖과 실내의 생기발랄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줌. 창밖의 풍경은 화면 중앙에, 실내는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하고, 실외는 축소되어 원근감을 주는데 비해, 실내의 평면과 단순한 색면은 안정감을 준다.
6. 1905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 부인 초상화. 인물을 어두운 면과 밝은 면으로 나누지 않고, 색도에 따라 차가운 면과 따뜻한 면으로 나눔. 모델의 자세는 전통적인 초상화 형식이나 원근법이 배제. 마티스는 주최측이 출품을 하지 않도록 종용했으나 고집을 부려 출품. 미국인 레오 스타인과 거트루드 스타인 남매가 사들임. 이를 계기로 화랑들이 마티스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
7. 이 작품은 색채 때문에 형태가 희생되었다는 비난에 대한 대답. 여기서 명암에 의한 원근법을 완전히 배격. 찬색과 따뜻한 색의 병렬 처리와 함께 굵은 선으로 구조가 확립. 중앙의 여인과 배경은 동일한 색채의 사용으로 평면화 하였으나 여인의 오른 쪽의 주홍이 초록색의 찬색 배경에 의해 앞으로 전진하는 듯한 느낌을주면서 원근감이 형성. 얼굴을 가로지르는 대담한 초록색은 전체 화면의 배경이 되는 초록색보다 연두색에 가까운 따뜻한 성격으로 앞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8. 청색누드는 이미 같은 제목으로 마티스가 청동 조각을 시도해 보기도 함. 1907년 앵데팡당전에 출품. 이 작품은 율동적인 선과 색채로서 3차원의 공간과 입체감을 추구하려는 구조의 훈련. 야수파가 하나의 미술운동으로는 끝나감을 암시. 색채는 갈색과 청색으로 제한되어 순수한 색채 실험보다는 선과 입체에 대한 관심사를 나타냄. 뒤의 드랭의 “목욕녀”와 공통점이 있는데, 색채의 제한과 굵은 윤곽선의 사용, 구조적인 관심에서 반 고호, 고갱의 색채에서 세잔느의 영향권으로 방향 전환. 아프리카 조각에 관심을 가져 얼굴이나 몸체는 아프리카의 몸이지만 서양의 전통적인 포즈를 취함.
9. 평면성을 추구한 그림. 식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여성, 왼쪽에 의자를 배치한 단순한 구성에, 식탁보와 벽의 벽지가 같은 색채에 같은 무늬를 사용하고, 두 경계는 짙은 붉은 색으로 구분하였지만 서로 영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임. 왼쪽 뒤의 풍경화는 전혀 다른 색채의 통일성으로 인해, 그림 속의 그림으로 볼 수도 있고, 또는 창 밖의 풍경화로 볼 수도 있음. 최초의 후식과 비교.
10. 부부간의 대화. 자신과 아내의 모습. 파랑 배경에 경직되어 있는 모습. 난간의 “안돼 Non”은 불가능의 의미.
11. 260x391. 러시아의 무역상인 츄슈킨이 모스크바에 잇는 18세기 양식의 자신의 집에 장식할 큰 그림을 의뢰하여, “음악”과 “춤”이라는 작품에 합의. 당시 마티스는 다수의 나체를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일에 몰두함. “춤”의 색채는 단순한 4가지 색채에, 손을 마주잡은 다섯 여인의 움직임은 거친 윤곽선에 의해 표현되고, 움직임의 부드러움과 리듬감이 잘 드러남.
12. 작품구도나 그래픽 측명에서 사양한 의도가 숨겨진 작품. 마티스는 아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들이 음악가가 되어주길 바랬지만 아들 피에르는 징집 덕분으로 피아노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했음. 마티스는 어린 피에르가 피아노 연습곡을 치던 때를 그림.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메트로놈의 삼각형과 아들 이마위의 삼각형, 그리고 왼쪽 창문에 비친 녹색의 삼각형이 연결되고, 악보대 위의 아라베스크 무늬와 그것이 확대된 형태의 무늬의 대조.
13. 3년 동안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미국 수집가 알버트 반즈가 자신의 건물의 세 개의 커다란 채광창의 장식 벽화를 의뢰. 길이 13m, 높이 3.5m, 총 면적 50제곱 미터의 종이조각을 몇 개월에 걸쳐 완성 후에 채색. 창밖이 녹색이고 그 안에 세잔과 솨라의 작품이 걸려 있어 마티스는 고심하여 만듬. 그는 “회화를 건축으로 표현하고, 프레스코를 시멘트와 돌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고 주장.
드랭 : 런던의 집결소, 1906, 65.7x99, 런던, 테이트 갤러리
드랭 : 목욕하는 여인 1907, 130.2x 192.7, 파리, 퐁피두에 대여
드랭(André Derain 1880-1954)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음. 1905년과 1906년에 걸쳐 런던을 방문하여 템즈강을 주제로 야수파의 풍경화를 그림. 블라맹크와 마티스의 중간적인 위치로 40세 이후에는 세잔식의 구성과 흑인조각에 관심을 갖고 입체주의에 경도됨.
14. 런던을 좋아하여 런던의 풍경화를 자주 그림.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야수파에 열중하여, 강렬한 색채를 구사하던지, 또는 색채를 평면적으로 칠하여 색-면으로서의 효과를 강조하던지, 또는 점묘풍으로 전개시켜 화면에 색채적인 움직임을 표현. 야수파 초기에 루브르에서 모작을 하고 있을 때, 수위가 지나가다 보고는 “이것은 그림에 대한 불경죄”라고 소리치는 일화가 있음.
15. 세잔의 영향. 마티스는 세잔에서 2차원적 성격의 선과 리듬, 그리고 3차원적 입체감과 주위 공간의 상호 관계에 흥미. 반면 드랭은 기하학적 색면구도와 단순화되고 각이 지는 인체의 윤곽선에 관심. 후일 입체주의로 나가는 경향. 1913년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드랭에서 태동되었다고 함.
블라맹크 : 드랭의 초상, 1905, 27x22, 멕시코 시티 작크 겔만 소장
블라맹크 : 서커스, 1906, 23.6x28.8, 베른, 베일러 갤러리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
모든 속박이나 규칙을 싫어하는 절대 자유주의자. “아버지보다도 반 고호를 더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그대로 캔버스에 칠함. “본능이야 말로 예술의 기초다. 그림은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심장과 창자로 그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복종, 질서를 거부하여 독학으로 일관.
16. 파이프를 물고잇는 모습이나 격렬한 색채의 사용은 반 고호를 연상시킴. 색채를 두텁게 사용하면서 강한 선으로 형태를 만듬. 얼굴의 노랑, 붉은 색은 마티스와 비교하여 화면 구조의 긴장감과 균형이 결여됨. 그는 “그림에 재주가 없었다면 나는 폭탄을 던져 해결했거나 교수대에 보내졌을 것이다” 라고 말함. 그의 색채에서 격렬함과 공격성이 엿보임.
17. 1906년작. 반 고호에서 보이는 들판과 들에서 일하는 사람, 방향감 있는 구불거리는 선,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 사용과 휩쓰는 듯한 율동감이 표현. 색면보다는 점묘법에 의지
죠르쥬 루오 : 거울을 보는 창녀 1906 60x70, 파리, 퐁피두 센터
조르쥬 루오 (Georges Rouault 1871-1958)
파리 빈민가의 지하실에서 태어남. 어려서부터 낮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견습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장식학교에 다님. 국립 미술학교에서 모로밑에서 회화의 기초를 닦음. 주제는 창부, 재판관, 서커스의 피에로, 예수, 성서적 풍경 등을 다두면서 새로운 종교화를 표현함. 독일 표현주의와 프랑스 야수파의 결합. 마티스와 함께 모로의 제자. “검은 색 안경을 긴 야수파”로 불림. 20세기초의 종교 미술가. 특징은 색채 주위에 검은 윤곽선을 두름.
18. 수채화로 1902년이래 연작으로 그린 창부의 그림 중 하나. 긴 양말을 신은 다리를 제외하고는 완전한 나체인데, 조금의 수치심도 없이 태연히 화장하고 있는 모습. 거친 삶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균형이나 건강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고, 표정은 없지만 어딘가 도전적인 느낌이 든다. 이 그림에는 창부에 대한 감상적인 동정도 없고, 삐뚤어진 사회에 대한 항의의 표현도 없는, 즉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성의 진실을 보여주고, 관람자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함.
1948년 루오는 화상 앙브르와즈 보라르와 그의 상속인과 끊임없는 싸움 끝에 자기가 미완성이라고 여기는 작품 315점을 대중 앞에서 소각시킴. 미술 시장에 큰 충격을 줌. 이 사건은 작품의 영속성에 대한 판단은 본인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판례가 됨. 참고. 이문열의 “금시조”. 천경자 화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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